언어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언어의 composability에 주목하는 것이다. 가령 ‘바닷물’은 ‘바다’라는 말과 ‘물’이라는 말을 합쳐서 만든 낱말이다. 한국인은 의무 교육에서 한자를 배우기 때문에 한자어 역시 각 한자로 분해된다. 한자에 좀더 익숙한 사람이라면 한자를 또 여러가지 방법으로 분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강하게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어원에 집착하는 경향도 있다. 이 관점의 대표적인 예가 국립국어원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국립국어원의 철학에 맞춰 제작된 교과서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러한 경향에 대해 매우 익숙하다. 가령 우리는 당연히 외래어를 지양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당연하다는 것은 사실 그럴 이유가 없다는 말로 여겨진다. 외래어를 지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바로 어원을 추적할 수 없는, 즉 분해할 수 없는 원자적인(atomic) 낱말의 수가 늘어난다는 점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은 어원을 추척할 수 없는 낱말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많이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바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순화된 우리말’이라는 것은 대부분 분해 가능한 형태의 낱말을 제안하는 것이다. 가령 국립국어원은 ‘다운로드’라는 외래어 대신 ‘내려받기’라는 단어를 제안한 바 있는데, 두 단어 사이의 차이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다운로드’는 이국적 어감을 가졌지만 ‘내려받기’는 그렇지 않다는 점(낱말을 임의의 발음과 표기로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다운로드’는 영어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분해될 수 없는 낱말인 반면 ‘내려받기’는 약간의 우리말 어휘만 알고 있더라도 쉽게 분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 분해와 조합이 가능해지면 어떤 좋은 점이 있다고 국립국어원은 그렇게 어원에 집착하는 걸까? 물론 이유가 있고 아래서 얘기하겠다.
다른 하나의 관점은 언어가 임의적이지만 합의로 기능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가령 세종대왕이 한글의 ㅅ을 위 아래 뒤집어서 v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우리는 모두 그 모양을 썼을 것이므로 언어적 기능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물이라는 뜻으로 ‘술’이라는 낱말을 쓰고, 술이라는 뜻으로 ‘물’이라는 낱말을 썼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그렇게 쓰고 있다면 역시나 언어적 기능에 어떠한 하자도 없을 것이다. 모두들 ‘바다술’이라는 말을 쓰며 살 것이다. 즉, 분해되지 않는 낱말들이 결국 그 형태에 있어 임의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어원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낱말의 현재 뜻, 즉 현재 그 낱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여겨지느냐를 중요하게 여긴다. 예를 들어 같은 뜻을 가리키기 위해 국립국어원에서 순화한 ‘휴대전화’라는 말보다는 사람들은 ‘핸드폰’이라는 단어를 훨씬 많이 쓰므로 ‘핸드폰’은 어감이 다소 이국적일지라도 더 적절한 낱말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어감이 이국적인 것은 장점도 단점도 아니다. 그냥 색이 어떻다 하는 식의 얘기일 따름이다.
할 수 있다
, 할 수 없다’라는 말에서 ‘수’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국어원은 ‘수
앞 뒤로 띄어쓰기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 수 있다’는 말을 굳이 분해하지 않고 하나의 원자적인 표현으로 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할수있다’라고 붙여서 쓰는 것이다. 다행히 띄어쓰기 문제를 제외하면 ‘할 수 있다’는 말은 그걸 조합으로 보든 하나의 말로 보든 의미가 통한다.
그런데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언어 역시 원래의 의미가 퇴색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달달한 양갱(羊羹)은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 양의 피와 고기로 만든 음식이었다. 그러다 선(禪)불교 승려들에 의해 양갱이 일본에도 소개되었는데,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므로 양을 쓸 수 없어 팥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어찌됐건 우리가 말하는 양갱이란 중국에서 양을 재료로 해서 만들었던 음식과는 다른 팥으로 만든 음식이다. 하지만 낱말을 분해하면 그 안에서는 팥이 아니라 양이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쓰는 말은 굳이 분해하지 않는다. 언어적 기능은 원래 분해하고 조합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기호를 어떤 뜻에 대응하고 있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즉, 합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럼 사람들은 한편으로 왜 말을 분해하는 습성을 지닐까? 특히 말을 분해하는 습성은 이른바 교육 받은 사람일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듯하다. 앞서 언어적 기능이 분해와 조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으나, 한편으로는 분해와 조합이 없으면 언어는 우리 생각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짐승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인간의 언어의 가장 큰 차이는 composability에 있는데, 덕분에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수학적 의미에서) 무한한 조합의 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와 같은 식으로 끝나지 않는 문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정보 이론적으로 말하면 언어의 조합과 분해는 압축이다. 너희 엄마가 부르셔
와 너의 아빠가 부르셔
를 각각 다른 뜻으로 암기해야 했다면 인간의 언어적 기능은 매우 제한됐을 것이다. Composability는 적은 정보 용량으로 더 많은 언어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해준다. 언어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은 뜻을 기호에 부호화(coding)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핸드폰’과 ‘양갱’으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저 두 단어를 분해하여 다시 적절한 어원을 갖는 조합으로 각각 ‘휴대전화’와 ‘팥갱’이라는 말로 순화한다고 하면 정말 압축의 잇점을 누릴 수 있을까? 아마 저 정도로 많이 쓰이는 말은 분해해서 얻는 이득이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이미 사람들 머릿속에 들어있고, 습관화된 사용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휴대전화’라는 말을 입에 붙인다고 해도 이미 쓰고 있던 ‘핸드폰’이라는 낱말이 사라져서 그만큼 용량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역전앞
같은 말 역시 굳이 낱말을 분해하지 않는다면 바로잡아서 얻는 이득이 크지 않다고 본다. (요즘에는 ‘역전’이라는 말 자체를 쓸 일이 많지 않긴 하다.) 또, 사람들이 ‘열폭’을 ‘열등감 폭발’이 아닌 ‘열 받아서 폭발’로 이해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열폭’을 ‘열 받아서 폭발’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느 정도 많아졌다면 ‘열폭’은 이미 두 개의 다른 뜻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새로운 낱말이 생겨왔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누가 처음 ‘산’을 ‘산’이라고 부르고 ‘바다’를 ‘바다’라고 불렀을까?
나는 주변 사람들, 특히 교양 있는 분들이 다른 사람들의 언어 생활에 좀더 덜 깐깐해져야 한다고 여긴다. 나라면 어린 아이가 바다를 보고 산이라고 한다면 말을 바로잡아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여러 사람들이 원래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쓰이던 ‘하릴 없다’를 언젠가부터 ‘할일 없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면 굳이 바로잡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하릴 없다’는 말은 이제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 글에서도 썼듯, 스스로의 언어 생활을 비교적 규범적으로 지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나 역시 글로 쓸 때는 ‘휴대전화’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걸 요구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