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民憙 (홍민희) 블로그

Compatibilism

사람들은 운명도 믿는 한편 자유 의지(free will)도 믿는다. 그 둘은 자유 의지를 어떻게 결정하냐에 따라 모순적일 수도 있고 조화로울 수도 있다.

이전의 물리적 상태가 이후의 물리적 상태를 결정한다는 관점을 결정론(determinism), 혹은 기계적 결정론이라고 한다. 기계적 결정론’이라는 말은 어찌됐건 이후의 물리적 상태는 결정되어야 하긴 하는데 사람의 자유 의지가 아니라 ‘기계처럼 차갑게, 규칙에 따라 결정된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예측 가능한 규칙을 지니는 게 왜 차가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보통 차갑다거나 딱딱하다는 식의 표현을 곁들인다.) 사람의 자유 의지로 결정되는게 아니라는 소리이다. 모든 과학은 결정론을 가정한다. 미래의 상태가 비규칙적으로 결정된다면 애초에 상태의 연속은 예측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이유를,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면 좋은 대안이 있다. ‘나’를 ‘나의 물리적 상태’로 정의하면 된다. 뇌를 포함한 나의 몸, 그리고 몸 주변 환경의 물리적 상태가 내 미래, 이를테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거나 어떤 그림을 그리게 하거나 어떤 수학적 증명을 하도록 하거나 어떤 영화를 감상한 후 감명받게 하거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게 하거나 배고픔을 느끼게 하도록 결정한다. 따라서 세상은 여전히 결정적인 한편 개인은 자유 의지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호환주의(compatibilism), 혹은 약결정론(soft determinism)이라고 한다. 참고로 나는 호환주의자다.

하지만 세상에는 호환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한쪽은 강결정론(hard determinism)을 옹호한다. 세상은 결정적이며 자유 의지 같은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난 호환주의와 강결정론이 세상을 보는 관점에는 차이가 없고 자유 의지의 정의만 다를 뿐이라고 여긴다.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적 자유주의(metaphysical libertarianism)도 있다. 사람들은 자유 의지에 따라 전적으로 혹은 어느 수준 이상으로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다만 호환주의와 다르게 자유주의자들은 ‘나’를 ‘나의 물리적 상태’와 동치로 보지 않는다. 즉, ‘나의 물리적 상태’와 별도로 미래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치는 어떤 정신적 실체를 가정한다. 이를테면 영혼 같은 것이다. 나는 여기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저렇게 주장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내가 형이상학적 자유주의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예전에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설명이 부족하다고 여겨 조금 더 부연해볼까 한다. 위에서 나는 형이상학적 자유주의가 영혼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비물리적 실체가 우리와 우리 주변의 이후 물리적 상태에 영향을 끼친다는 관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가령 영혼이 실제로 있고, 그래서 영혼이 우리의 몸을 통해, 아주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어떤 책을 읽게 했다고 상상해보자. 그럼 내 손이 책장을 넘기게 했을 것이고, 책장이 넘어가는 현상은 물리적 현상임이 분명하다. 방금 영혼은 어떤 물리적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따라서 영혼과 같은 별도의 정신적 실체가 실제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리적 현상을 일으키고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므로 비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물리적 실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유 의지는 물리적 상태를 결정하는 주체이므로 물리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물리적 주체인 영혼은 현대 물리학이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어쨌건 물리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으며(그런게 있다면 말이다) 영혼은 물리적 실체이므로 ‘이전의 물리적 상태’에 포함되게 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쯤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자유 의지 개념은 저런 것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어떻게 다를까?

형이상학적 자유주의에서의 자유 의지는 호환주의에서의 자유 의지와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자유 의지는 무작위적이며 과학적으로 예측 불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자유의지는 우리가 어제 저녁으로 된장국과 김치찌개 중에 무엇을 먹을지 망설이다가 된장국을 먹기로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망설이던 시점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된장국이 아닌 김치찌개나 혹은 다른 선택을 했을 수 있다고 본다. 반면 호환주의에 따르면 된장국을 선택하는 것은 뇌를 포함한 우리와 우리 주변 환경의 물리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 것이므로, 만일 그 시점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결정을 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정리하자면 형이상학적 자유주의는 실제로는 자유 의지가 설사 물리적 실체라고 하더라도 항상 정해진 법칙대로만 따르지 않는다면(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면) 성립한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형이상학 자유주의가 틀렸으며 과학적/철학적 추론보다는 종교적 기대에 가깝다고 믿는다.2 우리는 이미 스스로의 의지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매우 많이 느낀다. 아침에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의지가 아니라 악마의 속삭임으로 봐야 하는가? 호감이 가는 이성의 얼굴은 시험 공부를 해야 하는데도 머릿속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골치아픈 문제는 머리가 아파서 더는 생각하기 싫어진다. 혹은 더는 생각하기 싫은데 자꾸 생각이 난다. 내각의 합이 180도가 넘는 삼각형은 상상해보려고 애써도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말처럼 사람은 무엇을 할지 마음 먹을 수는 있지만, 무엇을 마음 먹을지는 마음 먹을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의 의지는 우리 멋대로 되지 않으며 일관된 법칙을 따라 결정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는 느낌은 그냥 그런 느낌, 정확히는 그러한 기억일 뿐 그냥 환영(illusion)일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마야(摩耶)라는 말이 있다. 나 자신과 나를 제외한 물리적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은 그냥 느낌일 뿐 환영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나도 내가 미래를 결정하는데 내가 결정한다고 생각하고 싶고 좀처럼 그런 ‘느낌’을 떨치긴 힘들지만 기대를 빼고 추론을 해보자면 그냥 환영이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인 판단 같다.


  1. 보충 설명. 유물론과 관념론 대립은 결정론과 형이상학적 자유주의와 많이 관련지어져 논의되지만 분리해서 더 명확하게 논의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2. 세상이나 세상의 어떤 것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얘기할 때는 추론을 해야지 기대를 섞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이유에서 예전에 Jeff Hawkins의 On Intelligence(생각하는 뇌, 생각하는 기계) 책 내용이 동의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글을 쓴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