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세 유래
오늘 한 고등학교 선배가 왜 전기료는 세금이 아닌데 전기세(電氣稅)라고 부르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전기요금은 엄밀히 말하자면 세금이 아닌데 왜 ‘전기세’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게 되었을까? 영어로도 utility 또는 electric/electricity bill 정도의 표현을 쓰지 tax 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혹시 ‘월세(月貰)’의 ‘세’자와 동일한 용법으로 쓰이는건가 해서 찾아봤는데, 여기서의 ‘세’는
남의 건물이나 물건 따위를 빌려 쓰고 그 값으로 내는 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어사전을 열어둔 김에 ‘전기세’를 검색해봤더니 한자 표현이 電氣稅이다. 세금의 ‘세’자와 동일한 문자이다. 오늘도 해결해야 할 의문 목록에 한가지 항목이 추가되었다.
나도 궁금해져서 찾아보았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는 전문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과거의 어휘 사용에 대해 조사해볼 수 있는 좋은 한국어 코퍼스(corpus)이다. 조사해본 결과 해당 서비스(1920년 이후의 기사들을 보존한다)로 찾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사는 일제강점기인 자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이다. 아마도 보도자료로 보인다. (강조는 인용자 붙임.)
電氣會社五圓 (當夜電氣稅全部無料)
분명 전기 회사라고 하는데 전기세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때부터 전기 요금을 전기세라고 불렀던 걸까? 좀더 찾아보았다.
찾을 수 있는 그 다음으로 오래된 전기세 언급은 자 동아일보 문화면 기사에 있다. 당시 신게키(新劇)가 이해하기 어렵고 고지식해서 대중들이 외면하는 탓에 도쿄의 신게키 극장들이 경영난에 시달렸다는 내용이다. (강조는 인용자 붙임.)
여기에서 小劇場 管理者는 劇場에쓰는費用—電氣稅、稅金、暖房費、人件費等—을 支拂할수 없게된다。
분명히 세금과 전기세를 구분하고 있다. 전기세는 세금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사실 전기료(電氣料)라는 말과 비교해보면 전기세는 원래부터 많이 쓰이는 말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전기료로 검색했을 때의 기사의 양이다.
반면 전기세로 검색했을 때의 기사의 양은 다음과 같다.
보다시피 일제강점기 때의 경우 전기세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았고 보통은 전기료라는 말을 썼다. 전기세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다가 광복 이후부터 서서히 쓰이기 시작한다.1
광복 이후인 1971년 10월 11일자 동아일보의 경제면 아래 기사는 왜 전기세라는 말이 광복 이후에 점차 많이 쓰이게 되었는지 짐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강조는 인용자 붙임.)
國稅廳 電氣稅직접徵收
國稅廳은 올해 稅收확보책의일환으로 지금까지 韓電을 통해 源泉징수하던 전기세를 연말까지 사용자들로부터 직접징수할 방침이다。
十一日 국세청 당국자는 전기稅의 직접징수는 특히 전기를 대량소비하는 대기업체를 대상으로 할것이라고 밝혔는데 이같은 방침은 韓電이 전기 사용자자들로부터 전기세가 포함된전기사용료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함에 따라 자동적으로 체납되는 전기稅의 징수를 촉진하기 위한것으로 알려졌다。
전기세가 포함된 전기 사용료
라고 한다. 그렇다. 1971년 즈음의 한전은 전기료도 받았지만 국가를 대신해 전기세도 징수했던 것이다. 전기세라고 불리는 간접세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일까?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1992년 성탄절의 경향신문을 보면 사회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왔다.
전기세표현은 잘못
전기요금이라 해야(…)
전기료는 가정에서 전기를 필요한 만큼 사용하고 사용량에 따라 한국전력에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이다。이를 전기세라고 표현하는 것은 국가나 지방 자치단체에서 징수하는 세금이라는 이미지를 주어 시청자들이 은연중 전기사업에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0년 사이에 전기세는 간접세에서 직접세로 바뀌었다가, 또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전기세라는 것이 부르는 것은 전기 사용과 함께 납부하는 소비세를 특별히 부르는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저 20년 사이에 전기세라는 것이 사라졌다는 소식의 기사 같은 것은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실제로 국어사전에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전기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기료’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여기서부터는 순전히 나의 상상이다.
내 짐작에는 전기세는 한전에 전기료를 납부할 때 함께 포함된 소비세를, 다른 소비세와 구분하여 오직 전기료에 대한 소비세만을 부를 때 전기세라고 불렀던 것이 아닐까 싶다. 혹은 한전에서 인쇄한 전기료 고지서 같은 문서에서 소비세 부분을 전기세라고 표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중간에 직접세로 바뀌었다고 하니, 그때 생긴 표현일 수도 있다. (그 전기세가 언제 어떤 식으로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찌되었든 지금의 전기세는 딱히 전기료에 포함된 소비세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전기세와 전기료는 같은 말이 되었다.
어쨌거나 앞서 인용한 경향신문 기사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전기료는 국가 혹은 지방자치단체에 납부하는 세금이 아니므로, 전기세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좋다.
혹시나 해서 중국어나 일본어로는 전기료를 뭐라고 부르나 찾아봤다.
중국어로는 띠앤페이(电费), 즉 전기비라고 한다. 일본어로는 덴키료(電気料), 즉 전기료라고 한다.
한자 사용이 줄어든 시대에는 실제보다 검색 결과가 적을 수 있다. 그러나 한글로 검색했을 경우 일제강점기에 다른 한자의 동음이의어가 너무 많이 잡혀서 한자로 검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