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民憙 (홍민희) 블로그

한글은 이제 한국어를 포함한다

해마다 한글날이 되면 한글과 한국어는 다른 것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제 지겹다. 매해 그런 주장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써오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사람들은 정말로 문자와 입말의 개념을 혼동해서 한국어를 한글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 한글 글자, 한글 문자라 지칭하면 사람들은 곧바로 그것이 입말이 아닌 문자를 뜻한다는 것을 알아본다. 반대로 한국말, 혹은 좀더 명확하게 입으로 하는 한국말이라고 해도 역시 사람들은 그것이 문자가 아닌 입말을 뜻한다는 것을 잘 알아듣는다.

요는 한글이라는 낱말에 대한 혼동은 아주 표면적인 수준의 혼동일 뿐, 실제 개념상의 혼동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사람들은 영어 등의 유럽 언어를 표기하기 위해 쓰이는 로마자영어를 혼동하는데, 이는 정말로 사람들이 프랑스어나 독일어에서는 영어와 전혀 다른 문자를 쓴다고 믿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로마자라는—주로 언어학적 엄밀성이 요구되는 맥락이 아니면 쓰일 일 없는—유용한 낱말을 아직 마주한 적 없거나 생소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문자 한글을 가리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말을 써야 할까? 위에서 힌트를 주었지만, 내게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첫번째 생각은 아주 나이브하다. 대부분의 맥락에서 우리는 언어학적 엄밀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은 모호하더라도 한글이 한국어를 뜻하는지 한글 문자를 뜻하는지 명확히 가리지 않아도 괜찮다. 사실은 한글한국어를 아주 명확하게 구분하는 사람들이 매해 한글날 마다 한글은 문자 체계지 언어가 아니다라고 지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편하게 한국어를 한글이라고 지칭하는 것에 대해 아무 문제 없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지적하는 사람들은 한국어를 가리키는데 한글이라는 말을 쓰면 정말 혼란스럽고 언어 생활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런 지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람들이 한글을 좀더 넓은 뜻으로 쓰이는 것을 알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 두 관점의 대립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다시 언급하자면, 한글의 사전적 정의가 먼저 존재하고 이를 사람들이 따라야 한다는 관점을 prescriptivism이라고 한다. 한편 사람들이 이미 한글이라는 말을 어떤 뜻으로 쓰고 있고, 그것이 그 말의 사전적 정의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descriptivism이라고 한다. 양 관점의 중간에서 현명한 줄타기를 해야겠으나, 나는 한글의 의미에 대한 갈등은 언중(言衆)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기 보다는 사전적 정의를 현실에 맞게 고치는 것이 더 낫다고 믿는다.

두번째 아이디어는 언어의 아주 유용한 특성인 redundancy를 활용하는 것이다. 어려운 말을 썼지만, 같은 뜻의 다른 말을 겹치면 된다는 얘기이다. 한글 글자, 한글 문자 정도로 표현해도 아주 충분하다. 물론 이를 두고 사람들은 역전(驛前)앞1이나 에스페란토어2, PIN 번호3와 같이 같은 뜻의 말을 두 번이나 중복해서 쓴다며 지적하거나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비웃을 일이 전혀 아니며 언어의 아주 유용한 특성을 잘 활용한 것이다.

현대 한국인은 한자 교육을 잘 받지 못하므로 역전으로부터 한자 驛前을 분해하지 못한다. 한국인이 쓰는 한자어는 분명 분해되는 규칙이 있고, 이는 한문으로부터 유래했으므로 한자와 같은 식으로 분해될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본어 마에((まえ))가 공간적/시간적 앞을 모두 뜻하는 것과 다르게, 한국어 (前)은 시간적 앞을 가리키는 뜻만 남아 더이상 공간적 앞을 뜻하는 식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개 역전이 공간적 앞을 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뜻이 통하기 위해 뒤에 을 붙이는 것은 매우 유용한 언어 활용이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스페란토를 전혀 모른다. 에스페란토라는 말이 에스페란토로 민족이나 국가가 아닌 언어 자체를 뜻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에스페란토어라고 뒤에 (語)를 붙여 이게 어디서 쓰이는 말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어떤 언어를 뜻한다는 것을 명확히하는 것은 도움이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redundancy는 문법적인 수준에서도 많이 등장하는데, 우리는 학교 간다라고만 말해도 알아듣지만 문어적으로는 모호성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중복되는 뜻의 말인 나는이나 격 조사 를 붙여서 나는 학교에 간다라는 식으로 문장을 구성한다. 하지만 입말을 쓰더라도 시끄러운 장소 등에서 전달이 어려울 때는, 다시 한번 말할 때 저러한 조사를 붙이거나 중복되는 의미를 연달아 말해서 redundancy를 높인다. 언어의 redundancy는 여러 상황에서 실제로 유용하기 때문에 추가된 것이고 모든 언어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된다.

딴소리를 너무 많이 했다. 돌아와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를 떠올려보자. 세종은 글조차 모르는 백성이 실제로 쓰고 있는 말을 위한 글을 만들고, 정음(正音)이라 하였다. 나는 이렇게 받아들인다. 똑바른 말이란 사람들이 실제로 널리 쓰는 말이다. 한글은 한국어라는 뜻으로도 이미 널리 쓰이고 있다. 한글의 뜻이 무엇인지는 이제 분명해진다.

덧. 다니는 회사에서 한글날을 기념해 스포카 한 산스라는 서체를 무료로 배포하게 되었다. 오픈 폰트 라이센스이므로 사용 뿐만 아니라 수정도 자유롭다. 아무쪼록 유용하게 쓰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1. 어떤 사람들은 역전앞의 전(前)이 이라는 뜻이므로 뜻이 중복되어 바른 말이 아니라는 얘기를 한다.

  2. 어떤 사람들은 에스페란토라는 말 자체가 언어를 가리키므로 를 붙이면 뜻이 중복된다는 얘기를 한다.

  3. 어떤 사람들은 PIN개인 식별 번호(personal identification number)의 약자이므로 뒤에 번호를 붙이면 뜻이 중복된다는 얘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