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엘리트주의인가
(이 글은 실험으로부터 분리된 이론은 과학이 될 수 없는가에서 이어지는 글이다.)
이덕하가 쓰는 진화심리학 글들이 대체로 오류가 많은 편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덕하 역시 여러 글들에 걸쳐 시인하고 있다.
가령 ’이덕하씨에 대한 응답’에 대한 응답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5년 이상 된 글에서 제가 수 많은 오류를 범했다는 점은 저도 기꺼이 인정합니다. 제가 봐도 쪽 팔린 글이 많습니다.
실은 이덕하는 이전에도 진화심리학 교수로부터도 잘못된 정보가 섞여있으므로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다
는 평가를 받은 바가 있다. 이덕하는 이에 대한 반응에서도 자신의 글에 잘못된 정보가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전중환 교수의 말대로 저는 진화 심리학을 혼자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 글에는 잘못된 정보와 바른 정보가 뒤섞여 있습니다. 사실 학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학자의 글에는 잘못된 정보가 섞여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전중환 교수는 이덕하도 인간이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잘못된 정보가 너무 많이 섞여서 혼란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부정확한 정보는 득보다 실이 클까
그렇다면 이덕하는 자신이 진화심리학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섞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진화심리학 입문서를 쓰겠다는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덕하는 직접적으로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 까닭을 밝힌 적은 없는 듯하지만, 어쨌거나 잘못된 정보가 꽤 섞여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실보다 득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쨌든
오류가 있으니 이덕하의 글은 읽지 말라는 식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제 글에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의 진화 심리학 번역서가 대부분 엉터리 번역이고, 한국 학자가 한국어로 진화 심리학을 자세히 소개한 글이 지금까지 사실상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그리고 저는 계속 진화 심리학을 배우고 있으며 제 글의 질이 높아지고 오류도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을 혼자 공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엉터리입니다. 게다가 전문가가 그것이 엉터리라는 것을 지적해 줘도 똥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적어도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Bayesian 님은 이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한 반대 입장을 보인다:
대중들이 보는 교양적인 과학 과련 글은 9의 진실을 전달하더라도 1의 잘못을 전달해서는 안 된다는 게 개인적 생각이다. 진실을 전달한다는 핑계로 거짓을 섞는 걸 정당화하는 사람은 교양서 저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본다.
— Bayesian (@bayescog) April 4, 2013
꼭 진화심리학 뿐만이 아니라도, 세상의 여러 분야에는 학계로부터의 어떠한 검증도 받지 못했지만 이해하기 쉽게 쓴 교양서가 해당 분야를 대중적으로 퍼뜨리는데 일조한 서적들이 한둘쯤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서적들은 어쩔 수 없이 꽤나 잘못된 정보다 많이 섞여있는 법이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이 각자 전문 분야의 그런 책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나는 초보자를 위한 C 21일 완성 같은 책들이 떠오른다.)
이런 책은 더 적절한 책이 시중에 등장하기 전까지 홀로 서점을 지키며 (잘못된 내용과 함께) 해당 분야를 대중에게 널리 소개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문제는 전문가들이 직접 집필한 더 적절한 책이 출판되거나, 번역이 완료되어도 그러한 초기 서적이 여전히 잘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디까지 떠먹여 줘야 하는가
어쨌거나 진화심리학을 위한 그러한 적절한
책은 이미 출판된 상태다. David Buss의 진화심리학이 작년에 번역된 바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해하기도 쉽고 대가가 쓴 책이니 잘못된 내용도 별로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다. 이런 반응들을 예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두꺼운 책을 바쁜 현대인이 어떻게 읽느냐
(번역된 진화심리학은 총 736쪽 분량에 무게는 1300g이나 된다.)책만이 공부 방법이라고 하면 엘리트주의 아니냐
블로그가 더 이해하기 쉽다
저 얘기들은 분명 틀린 말들은 아니지만 전문가들에게는 더이상 얘기하고 싶어지지 않게 만드는 반응인 것이다.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쉬운 책이 필요한 것도 맞는 말이고, 우리말로 되어 있어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인데, David Buss의 책을 이렇게 번역까지 해줬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된 거 아니냐고 느낄 수 있다. 대체 어디까지 떠먹여 줘야 한단 말인가?
저런 반응들이 너무나 바보 같이 여겨질 수 있지만 그렇게 느낀다면 당신은 얼마간 지적 엘리트주의에 동조하고 있다고 자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가 충분한 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저런 기준이 높을 수록 엘리트주의라고 한다. (고백하자면 나도 엘리트주의적으로 생각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기준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David Buss의 책도 어렵다. 이덕하와 같은 사람들이 더 쉽고 원문부터 한국어인 진화심리학 입문서를 써준다면 그 사람들 중 일부는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
비판은 자원을 소모한다
그렇다면 전문적인 과학자 집단은 엘리트주의적이라고 결론 내려도 좋은 것인가? 심지어 Bayesian 님은 자신의 분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또 열받네. '지식과 용기가 있으면' 비판해 보라고? 대단한 패기다.
— Bayesian (@bayescog) April 5, 2013
Bayesian 님이 이덕하의 태도를 부당하게 여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학위를 가지고 있는) 다른 과학자들은 왜 대체로 그 부당함에 동감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그 부당함이 학위 미소지자인 진화심리학 애호가가 학위를 소지한 과학자인 자신에게 대들었기 때문에 괘씸함을 느낀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Bayesian 님 스스로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덕하의 글이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했지만, 이전 글에서 다루었다시피 우리는 이덕하가 서툰 과학일 수는 있어도 과학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부당하단 말인가?
Bayesian 님을 열받게 한 이덕하의 Bayesian님, 지식과 용기가 있다면 제 글의 내용을 비판하십시오을 인용해보자:
Bayesian 님,
게다가 올리는 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추측에 대해 횡설수설이라고 하셨는데 지식과 용기가 있다면 한 편이라도 내용을 비판해 보시지요. 제가 세 번 정도는 응답을 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글을 곱씹어보며 느낄 수 있는 것은, 저 글은 결국 ‘내용’을 비판해달라는 ‘요청’이라는 점이다. 이덕하는 내용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글에서도 비슷한 부탁을 한다:
저는 전중환 교수가 그냥 저를 피하라고 권하는 대신 저의 글에 섞여 있는 오류를 조금이라고 지적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제가 수긍을 하고 고치든 반박을 하든 할 것 아닙니까? 진화 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에게 초 치는 이야기를 하려면 약간이라도 비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번역, 번역 비판, 글이 몽땅 쓰레기라서 아예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바른 정보가 뒤섞여라고 쓴 것으로 보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관심은 일종의 제한된 자원이라는 것이다. 비판해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의 관심은 무한정한 것이 아니다. 다들 바쁜 사람들이고 한가하게 세상 블로그의 모든 글에 대해 비판을 해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 내용이 과연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인지 평가를 해야 한다. Bayesian 님이 보기에 이덕하의 글들은 관심을 가지고 공들여 비판 글까지 쓸만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워낙 이덕하의 블로그가 검색 엔진에도 잘 걸리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니까 내용을 보기엔 시간이 아깝고 트윗 등으로 한두마디 한 것이다. Bayesian 님은 Alan Kang 님의 글에 대한 답변에서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은 제가 잉여이기 때문이고, 하필 이덕하 씨가 눈에 띄어서 그런 것이겠죠.
다소 관련 없는 주제의 글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sonnet 님의 아마추어 암호 설계자에 대한 메모라는 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는 위 글의 암호학자를 다른 분야의 과학자 혹은 공학자로 확대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고 본다. 이 글이 의미하는 점 한 가지는 어떤 최소화된
정의를 따른다고 해서 그가 학계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기성의 집단 앞에서 자신이 그 집단의 일원이 될 만한 적절한 tradecraft를 익혔고 또한 이 집단이 추구하는 방향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유능한 동료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선 글에서 이덕하가 과학계의 최소화된 정의
(이덕하의 글은 과학적인가) 따르고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Bayesian 님이 심리학계의 일원으로서 이덕하의 글들을 내용 측면에서 비판해주는 수고
를 해준다고 해도, 이덕하 자신은 대중이 아니라
Bayesian 님을 포함한 다른 심리학계에 어떤 수고를 해줄 것인가? 내용에 대한 비판과 같은 관심은 결국 한정된 자원이므로 과학계는 학술지 논문 심사(peer review)와 같은 방식으로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그러한 자원에 탐이 난다면 과학계에서 동료로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다. 학위란 결국 과학계에서 그런 인정의 절차로 볼 수도 있다.
Bayesian 님 같이 그러한 절차를 정식으로 밟은 과학자들이 보기에는 이덕하와 같이 어떠한 절차나 노력도 없이 내용에 대한 비판을 요구하는 행동에 부당함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런 비싼 자원을 가져갈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격을 얻는 데에 얼만큼의 절차와 노력이 적당한 것인가? 이미 학위를 소지한 과학자들이 보기에는 학위를 얻기 위한 그와 같은 절차나 노력은 과학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충분히 감수할만한 것일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것조차도 여전히 너무나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또다시 어디까지 떠먹여 줘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떠오른다. 지금의 과학은 엘리트주의인가?
어떤 기준을 충분한
것으로 정하더라도 결국 누군가는 충분치 않다고 그럴 것이고, 이미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그런 사람들을 엘리트주의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학위 소지를 하지 않은 대중의 과학 애호가로서 지금의 과학에는 엘리트주의적인 일면이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어떤 프로그래머들은 내 블로그에 올라온 평소 글들을 보고서 엘리트주의라고 생각할 것이다.
문득 어째서 과학이 대중화되는 데에 수많은 좌절을 겪고 있는 이유가 과학계의 이러한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