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民憙 (홍민희) 블로그

이하의 글은 2011년에 쓴 것입니다. 오래된 글인 만큼, 현재의 생각과 전혀 다른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 있고,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 점도 있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 잘못 알려졌던 정보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찌됐든 저는 제 오래된 글이 회자되는 것을 저어합니다. 읽기에 앞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의식, 감각력 (consciousness, sentience)

최근, 내가 매우 좋아하는 Steven Pinker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How the Mind Works)를 처음부터 읽고 있다. 원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보다는 목차를 보고 흥미있는 곳 위주로 읽는 편이라 제대로 읽는 것은 처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마음, 정신, 영혼(유령이나 귀신 말고), 의식 따위에 관심이 있었고 고백하자면 비교적 최근(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관념론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1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쯤에 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나 에덴 밖의 강(River Out of Eden), 눈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 등을 읽고,2 고3 때에 수능 보기 직전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Steven Pinker의 언어 본능(The Language Instinct)을 읽어버렸는데, 이게 치명타였다. 언어 본능의 내용이 모두에게 강하게 와닿으리라 생각치는 않지만, 적어도 프로그래밍을 해왔던 내게는 너무나 설득력이 강했기 때문에3 언어와 사고에 대한 나의 여러 생각들을 완전히 갈아엎는데 일조했다.4 그 전에도 Jef Raskin의 Humane Interface를 읽으면서 인지 과학(cognitive science)에 대해 관심이 조금 생기긴 했었지만, 결정적으로 Steven Pinker의 책 덕분에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과 인지 과학에 크게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본래는 마음이라는 것이 물리학 법칙처럼 소수의 근본적인 규칙들로 이루어져있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환원론적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마음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지라 Steven Pinker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이 내게 있어서는 사고방식의 정말 큰 전환점이었다.

인공 지능(AI), 정확히는 일반 인공 지능(general ar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졌고5 무엇보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생겼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AI에 대한 생각과는 매우 대조적인데, 그 때의 생각이 어땠는지는 그 당시에 친구에게 했던 나의 말로 추측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난 AI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예를 들어 영화 The Matrix와 같은 세계를 보면, 실제 세계를 흉내내는 거잖아? 흉내내려면 흉내내려는 대상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실제 우주의 물리 법칙을 모두 알아야 할 거 아냐. 하지만 우리는 아직 우주에 적용되는 물리 법칙에 대해 모두 아는 건 아냐.

마찬가지로 AI를 만드려면 AI가 흉내내려는 대상인 사람의 정신에 대해서도 모두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 인류가 인간의 정신이 어떤 근본적인 규칙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AI는 못 만들거야.

제대로 기억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요지는 대충 저랬다. 인간의 마음이 소수의 근본적인 원리로 설명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의 나를 모두들 비웃어주기 바란다. (나도 부끄럽지만 비웃고 있다.) 지금은 AI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CAPTCHA를 사람이 풀어낼 수 있다면 컴퓨터 프로그램도 풀어낼 수 있다. 따라서 CAPTCHA는 약자와는 달리 궁극적으로는 컴퓨터와 사람을 비교할 수 없으며, 그 외에 어떤 튜링 테스트(Turing test)로도 컴퓨터와 사람을 구분하지 못할 거라고 믿는다. (물론 지금의 AI 수준에서는 틀린 얘기지만.)

하지만 이런 내게도 아직까지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의식(consciousness)이다. 중학생 때 CLAMP의 쵸비츠(Chobits)를 읽으며 (오덕오덕) 했던 생각들이 난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명확하게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더라도 과연 의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서는 Steven Pinker도 설명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2장 처음부터 2장의 끝에서 의식에 대해서 다룰 거라고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난 갑자기 어떤 설명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책이 의식을 설명하려 덤벼들다 헛소리나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많이 했다.

어찌됐든 이 책은 의식—정확히는 이 책에서 의식을 세 가지로 나누고 그 중에서 내가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을 감각력(sentience)이라고 표현한다—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리고 내가 제시한 여러 의문들에 대해서도 모두 언급한다. (이러한 질문들을 언급한 시점에서 나는 책이 헛소리를 할 거라는 의심도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소 허탈한 얘기를 한다.

이 책은 과학 서적이고 의식을 다룰 수 없다. 과학은 측정 불가능한 것을 다루지 못하는데,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들은 마음이 측정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최근의 인지 과학 등은 마음을 측정해냄으로써 과학의 문제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의식은 당사자만 느낄 수 있으므로 측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의식은 과학으로 다룰 수 없지만,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의식의 문제는 평행하고 한쪽이 풀려야 다른 한쪽도 풀리는 관계는 아니다.

맞는 얘기인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인간과 동등한 육체와 마음을 디자인하고 구현했고, Descartes의 말처럼 송과선(pineal gland) 같은 인터페이스로 의식과 연결을 했든 혹은 그 의식을 비워두었든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과 다르지 않을 것이므로 마음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마음과 의식은 분리 가능한 실체들이다.

아직 2장밖에 읽지 않았지만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매우 뛰어난 인지 과학 입문서라고 확신할 수 있다. 나도 다 읽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주변 사람에게 강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아버지 서가에서 빈 서판(The Blank Slate) 역시 훔쳐왔는데 그것도 다 읽고 아버지와도 토론을 해봐야겠다.


  1.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Arthur Schopenhauer 같은 유아론(solipsism)에 가까웠다. 신앙을 버린 대신 불교와 명상에 심취하신 아버지 영향이 큰 듯. (나나 아버지나 종교도 없고 무신론자이다.)

  2. Richard Dawkins의 최근 행보가 워낙 종교에 도발적인지라 거부감이 드는 사람도 꽤 있는 걸로 아는데, 내가 저 책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과격하진 않았고, 사실 지금도 그의 도발적인 태도는 조금 불편하긴 해도 그가 말하는 종교에 대한 내용 자체는 맞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나는 종교인도 아닌데다 원래 무신론자이고,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유일한 종교인 불교는 그가 열렬히 성토하는 종교들과 매우 무관(절대자도 없고, 따라서 믿을 대상이 없으니 신앙이 기본인 종교가 아니며, 세상과 인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대해서도 설명하려하는 바가 없으므로)하기 때문에 별 감정이 들지 않는다.

  3. Noam Chomsky의 생성 문법(generative grammar) 설명을 읽는데 내가 이미 아는 BNF가 나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여러 메타포가 결국 프로그래밍과 컴퓨터 과학에서도 반복되는 주제들이라 굉장히 친숙했다.

  4. 언어에 대한 그 전까지의 내 생각은 언어결정론(Sapir–Whorf hypothesis)에 가까웠다. 물론 언어결정론에 대한 현재 나의 생각은 너무 naive한 설명인데?이다.

  5. 사실 원래 Lisp에 관심이 있다보니 그쪽으로부터 옮겨진 것도 있다. Lisp 창시자인 John McCarthy 같이 내가 잘 아는 이름이 Steven Pinker 책에서 나오면 매우 반갑다.